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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명소 '금장대' 오영학
  • 기사등록 2015-01-26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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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장대


금장대는 봉황대와 함께 경주의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 있던 절 혹은 건물의 이름인 “금장”을 따서 금장대(金藏臺)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은 그 경치가 매우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지나가는 기러기들이 쉬었다 간다고 하여 경주의 여덟 가지 기이한 현상(三奇八怪) 가운데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이라 불리워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을 비롯해 몇 가지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다. 그리고 금장대의 아래에 만들어진 예기청소(藝妓淸沼)는 형산강의 본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들어낸 것으로, 김동리의 단편소설인 <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금장대는 빼어난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적이 같이 공존하는 곳이다. 금장대가 위치하는 구릉 전체는 고분군이며, 그중 도굴흔적이 잘 남아 있는 무덤이 남북 두 개의 봉우리 정상부에 각기 1개씩 있다. 그리고 이곳엔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를 비롯하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으로 공덕을 쌓고자 했던 금장사지, 그리고 화랑의 수련터, 조선시대 건물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유적이 작은 한 공간에 모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선사시대 때 주거지, 사리공양석상과 거북문석상, 임신서기석, 고인돌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금장대는 시대적인 패러다임에 따라 그 공간적인 의미가 달리 이해되어 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이곳은 시인묵객들이 ‘금장낙안’의 풍광 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없음을 인식하면서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던 공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경주의 넓은 평지에 가장 큰 물길과 물가에 자리한 구릉이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니고 있는 금장대는 이런 다양한 문화적인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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