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관계자는 이날 미·북 대화 가능성에 대한 본지 질의에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당시 김정은 위원장과 세 차례 역사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안정화시켰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김 위원장과 어떠한 전제 조건 없이 대화하는 데 열려 있다”고 말했다. 백악관은 그러면서 “미국의 대북 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기존 정책 틀을 재확인하면서도, ‘비핵화’ 용어는 쓰지 않은 것이다.
백악관의 이 같은 입장은 일주일 전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김정은이 지난달 21일 최고인민회의 회의에서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면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자, 백악관은 다음 날 논평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김 위원장과 대화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대화의 전제조건과 목표로 ‘북한 비핵화’를 명확히 했다. 국무부 고위 당국자 역시 같은 날 언론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여전히 미국의 정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백악관의 기조는 한층 유연해졌다. 북한이 대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비핵화 포기’를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전제조건 없는 대화’라는 문구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사실상 역제안을 내놓은 셈이다. 비핵화에 합의하지 않더라도 김정은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트럼프가 열어둔 것이라는 평가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1일 “한미 양국은 한반도 평화 및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에 열려 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혀왔다”며 “비핵화는 한미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일관된 목표”라고 했다.
이에 따라 10월 말 한국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북 정상이 판문점 등에서 깜짝 회동할 가능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여전히 “미·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은 낮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트럼프가 기존 외교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 돌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고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도 최근 미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언급은 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은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또 지난 28일 북·중 외교장관 회담 뒤 중국은 보도자료에서 ‘힘에 의한 강압’ ‘일방주의와 강권 정치에 공동으로 저항’ 등 미국을 겨냥한 표현을 담았지만 북한 보도엔 모두 빠졌다. 이 때문에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국과 마찰을 빚을 수 있는 표현은 여과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깜짝 회동’을 한 바 있다. 당시에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북미 대화를 제안했던 트럼프 특유의 돌발 행동은 국제 사회를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