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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로 돌아온 조선의 ‘적폐 기술’
  • 이현상 논설위원/중앙
  • 등록 2019-06-27 1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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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이렇게 썼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꼭 인연만일까. 손에 들어온 기회를 기회인지조차 모르고 놓친 뒤 오히려 당하는 어리석음을 역사는 기록한다. 


1543년, 일본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의 도주 도키타가(時堯)는 표착한 중국 상선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선원으로부터 머스킷(화승총) 두 자루를 샀다. 대가는 은 2000냥. 지금 가치로 치면 대략 20억원이다. 당시 물가 수준으로 병사 200명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돈이다. 변방의 도주는 어떻게 이런 많은 은을 갖고 있었을까. 


그 궁금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에서 유출된 첨단 제련술을 만난다. 연은(鉛銀)분리술. 광석에 섞여 있는 납과 은의 녹는 점 차이를 이용한 획기적 기술이다. 함경도 단천 광산에서 일하던 양인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 개발해 연산군 앞에서 시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의 관심은 은으로 살 수 있는 명나라 비단에 있었겠지만, 아무튼 이 기술은 한때 조선을 은 생산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반정에 성공한 중종 세력에게 이 기술은 사치와 향락을 조장하는 ‘적폐’일 뿐이었다. 사치 근절과 농업 장려라는 명분 속에 단천 광산은 폐쇄됐고(1516년), 신기술은 설 곳이 사라졌다. 


단천 광산 폐쇄 17년 뒤, 길 잃은 조선의 제련술을 반긴 곳은 일본 이와미(石見) 은광이었다. 조선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기술자가 새 제련술을 선보였다. 변변찮던 이와미는 순식간에 세계 2위 은광이 됐고, 일본은 은이 넘쳐나는 나라가 됐다. 적폐로 몰려 쫓겨난 조선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변방의 도주 손에 들려 있던 은 2000냥은 없었을지 모른다. 49년 후, 복제와 개량을 거듭한 두 자루의 머스킷은 ‘조총’으로 바뀌어 조선의 심장을 겨냥했다. 


500년 전 역사는 한국형 원전 기술 유출 논란을 계기로 현재와 오버랩된다. 원전 운영 진단 프로그램인 ‘냅스’(NAPS)라는 첨단 기술이 UAE와 미국 회사로 빼돌려졌다는 의혹이다. ‘탈원전’ 탓 아니냐는 의구심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극구 부인한다. 내부 절차에 따른 정당한 기술 수출이었고, 산업스파이로 의심받는 간부의 이직도 현 정부 출범 이전 일이라는 것이다. 


의혹은 수사를 통해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원전 기술이 한국 땅에서 점점 자리를 잃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수원•한전기술•한전KPS 등 원자력 관련 공기업 3사에서 제 발로 나간 인원이 144명이다. 탈원전 정책 시작 전인 2015년의 두 배 수준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해외 원전 기업으로 이직했다.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다 기술이요, 노하우다. 싹수 노란 가능성에 매달릴 후진들도 없다. 서울대의 한 원자력 교수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연구실이 늘 떠들썩했는데, 요즘은 적막강산"이라고 하소연했다. 50년 쌓아온 원전 생태계가 무너지는 현장이다. 


이런 풍경이 어디 원전뿐인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제철소는 ‘환경 적폐’ 오명 속에 조업정지를 당할 판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문제삼지 않는 고로 정비 방식이 유독 한국에선 문제가 됐다. ‘4대강 적폐 청산’ 구호는 기어코 보(洑)를 허물겠다는 기세다. 거금을 들여 개발한 해외 광산은 ‘자원 외교 적폐’ 딱지가 붙여진 채 헐값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게 구정물이고, 어떤 게 아기인지 구분하려는 생각은 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조선의 손에 잡혔던 기회를 발로 차버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돈과 살길을 쫓아 기술을 팔아먹은 ‘배신자’에 있는가, 세상과 시대 흐름에 눈 귀 막은 어리석은 위정(爲政)에 있는가. 구정물과 함께 버려진 아기는 21세기 경제 전쟁에서 어떤 조총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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