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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선거 - 제15대 - <미디어 선거> 이회두 본부장
  • 기사등록 2017-05-03 17:18:31
  • 수정 2017-05-04 21: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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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선거의 특징 요약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선거, 초대부터 제15대까지의 특징을 요약해 본다.


1공화국의 이승만(李承晩), 사사오입 등의 무리수를 두며 장기집권을 노리다가, 19603·15부정선거에 따른 4·19혁명으로 인해 당선이 무효 처리되어 결국 하야하고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3·4공화국의 박정희(朴正熙)는 독재정치와 유신헌법 개정을 통해 종신집권을 노리다가 10·26사건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5공화국의 전두환(全斗煥)12.12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고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그대로 모방해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출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6.29선언으로 직선제로 치러진 한국 정치사의 획기적인 선거는 야권의 분열로 인해 군사정권의 연장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盧泰愚)가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9212월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3당 합당 이후에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 김영삼(金泳三)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15대 대통령선거는 김대중(金大中)이 대통령선거 사상 처음으로 야당에 의해 정권교체를 이루고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성역 없는 사정과 중단 없는 개혁을 선언하며 역사바로세우기를 밀어붙였다.


광복 50년을 맞아 민족 수난의 상징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고,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로 시작하여 두 전직 대통령을 나란히 법정에 세웠으며 하루밤새 50개의 별을 떨어뜨리며 군내 최고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척결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전두환씨와 22년 징역형을 받은 노태우씨는 IMF 굴욕적인 긴축통치 중이던 19971222일 특별 사면되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김대중 대통령이 사면한 것이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중에 사면된 것이다.



아무튼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의 척결로 군의 정치개입을 없앤 것은 커다란 공적이지만, 아들의 인사개입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니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하겠다.


김현철씨의 구속과 이회창 후보선출


1996년 말 신한국당이 노동관계법을 단독으로 처리하면서 여야는 기다렸다는 듯 대립의 각을 세우게 되고 19971월 노동계의 전국적인 대파업이 일어난다.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1997, 그 해 1월말 한보비리 사건이 터져 나오고 김대중 총재의 북한자금 1만달러 수수 폭로에,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의 YTN 인사개입 파문이 겹친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으며 한보 청문회가 실시되고 김현철씨는 구속이 되면서 정국은 일단 안정되는 듯 보였다.

이런 와중에 신한국당의 경선과정은, 집권 여당으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경선을 실시한다는 점에서 초기에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 신한국당의 후보로는 이른바 '9'이라 하여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민주계의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민정계의 김윤환, 이한동,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150만 표를 득표한 박찬종이 나섰다.


- 최형우가 19973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경선에 나서지 못한다.

- 김윤환은 "차기 대통령은 TK가 아니어야 한다"고 후보 등록을 포기한다.

- 민정계 중진인 최병렬과 김종호가 경선 참여 선언한다.

- 당내 기반이 약했던 박찬종, 이홍구가 경선자격을 중도 반납한다.

- 김종호가 중도 사퇴한다.


- 3당이 합당한 민자당은 계파별로 지지후보가 달랐는지라 민자당내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 지지파로 분열하고, 김윤환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가 단합하여 이회창을 지지하여 이회창이 승리한다.


-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된 후, 이회창의 아들 두 명이 모두 체중미달 사유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둘째아들의 병적기록표에 부모가 아닌 백부, 백모가 기재되어 있는 등 석연찮은 정황이 계속 발견되자 국민 여론은 차갑게 돌아섰고 급기야 이회창의 지지율은 10%대로 폭락하기에 이른다.


-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고 11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하면서, 여당 심판론이 힘을 얻는다.

- 신한국당 경선에서 탈락한 이인제가 여론조사 지지율을 명분으로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만들고 대선에 출마하여 19.2%를 득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김대중의 승리를 돕는 일등공신이 된다.



이처럼 1997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성역 없는 사정, ‘대쪽 후보를 외치던 여당에게는 치명적이었고, 여당의 정쟁 속에 야당에게는 큰 기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19964.11총선 민심


김대중은 북한의 NPT탈퇴 이후 북핵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19937월 귀국하고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다.


1994년 말부터 민주자유당 내의 민주계를 중심으로 한 여권 핵심부가 공화계의 김종필 대표의 2선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무언의 동조를 한다.


19952월 김종필은 공화계의 동조세력을 이끌고 탈당하여 같은 해 330일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아마도 이때 퇴진을 강요당한 김종필은 김영삼에게 심한 배신감을 곱씹으며 이를 갈았을 테고 후일 DJP연합의 출발점이 되었다.


19956월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에서 YS의 민자당은 참패하고, DJ의 후원을 받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은 서울과 호남을 석권했으며, YS에게 버림받은 김종필(JP)의 자민련은 대전, 충남·, 강원을 휩쓸었다.


지방선거 이틀 뒤인 629, 19941021일의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되살아나게 하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502명이 사망하는 등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김영삼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한다.


이러한 어수선한 정국 속에 김대중은, 지역등권론을 주창하며 정계에 복귀하고, 95일에는 김대중을 따르는 인사들이 민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1996411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을 일종의 대선 전초전으로 본다면, 격이었고, 결과는 신한국당이 139, 국민회의 79, 자민련 50, 민주당 15석을 얻었다.


이 결과를 두고 네 개의 정당은 모두 위기를 느끼게 된다.


신한국당은 새로운 인물인 차기대권후보군 빅3 이회창, 이홍구, 박찬종을 영입하는 전략을 실행하여 선전하였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뭔가 큰 것 한방을 준비해야 했다.


국민회의가 얻은 79석은, 은퇴번복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끌어낼 것으로 기대한 김대중의 목표의석 100석에 한참 못 미치는 것으로 거짓말쟁이 부담감을 벗어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자민련의 50석은 김종필은 죽지 않았다는 의미 있는 의석수이지만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어중간한 크기라는 고민이 남는 수이다.


15석의 민주당은 더욱 난감한 지경인 것이, 지방정치에서의 선전이 DJ의 후광 덕분이라는 지적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각 정당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며 돌파구를 찾으려던 시기인 19968, 김대중 대선준비팀 동북아 포럼워크숍이 제주도에서 비밀리에 열리고 ‘DJP 공동집권론전략을 마련한다.

15대 대권 후보들의 용쟁호투(龍爭虎鬪)


김종필과 박태준의 선택 김대중


198781일 조선일보-MBC-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35.2%, 김대중 29.1%, 김종필 10.7%로 신한국당 경선을 승리한 이회창이 1위를 차지하다.


813일 조순의 대선 출마선언으로 한국갤럽의 긴급 여론조사, 김대중-이회창-김종필-조순 순으로 김대중이 1위로 올라온다.


대선공식선거운동을 두 달여 앞둔 913일 경선에서 2위를 했던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신한국당은 분열된다.


이인제는 경선불복을 소신이라고 포장하려는 듯 박정희이미지를 따라하였는데 이 작전은 김대중과 이회창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유권자의 마음을 잡는 데 효과를 나타내어 대구, 경북에서부터 부산경남과 강원으로 퍼져갔다.


이인제의 탈당 출마와 이회창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으로 여당이 분열하고 강삼재가 폭로한 김대중 비자금설 등으로 술렁이는 가운데, 914일부터 1027일까지의 실시된 여론조사의 결과는 김대중-이인제-이회창 순으로 변동 없이 유지된다.



19971031, 김영삼으로부터 외면당한 김종필은 김대중과 함께 이른바 영남포위전략 혹은 서부벨트라 불리는 DJP 연합을 성사시킨다.


연합의 목적은, 김대중이 대통령선거 후보를 맡아 집권하면 양당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그 총리는 자민련이 맡으며, 내각제개헌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기로 한다는 것이다.


DJP 연합 발표 직후인 114일 민자당 민정계 대표였던 박태준이 동참하였고, 11일에는 민주당에 남아 있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된 국민통합추진회의도 합류하였다.


DJP연합은 김대중에게 호남을 벗어나 전국으로 지지기반을 확대하게 만들어 주고, 중도층과 보수층에 거부감으로 있던 과거 독재정권이 덧씌운 과격’, ‘용공의 이미지를 단번에 극복하게 해주었다.


여기에 산업화의 상징인 박태준 포항제철 명예회장과도 연대에 성공함으로써, 화해의 이미지와 함께 확실하게 중도층과 보수층에 안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인으로서의 김대중을 어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회창의 반격


19971021일 검찰이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대통령선거 이후로 유보하겠다고 발표하자 이회창은 김영삼을 비난하며 탈당을 요구했고, 김영삼이 117일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이회창은 조순의 민주당과 통합하여 한나라당을 출범하는데 이 때가 121일이다.


11월부터 이회창은 TK지역의 반YS바람, YS의 이인제 신당지원설 등으로 영남지역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이인제를 공격하여, 마침내 1117일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34% 이회창 24.4% 이인제 23.7%2위 자리를 탈환하게 된다.




미디어의 위력


말한바와 같이 15대 대선은 본격적인 미디어의 위력이 발휘된 선거이고 이러한 형식으로 최고의 수혜를 누린 경우가 김대중 후보이다.


김대중은 TV토론을 최고의 무기로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 초기에는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2백억 원 제공설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당에서 그런 주장을 했으나 이인제 후보와 국민에게 사과한다는 식으로 유연하고 적절하게 대처해 나갔다.


당시 TV토론 합의사항에는 한 후보가 정견을 발표할 때 다른 후보를 카메라로 잡지 않기로 하였는데, 김대중은 다른 후보들이 자기 발언 내용을 챙기는 그런 시간을, 코도 풀고, 기침도 하고, 물도 마시는 등 충분히 활용하기도 했다.


지지도가 양강 구도화 되자 김대중은, 비자금, 건강, IMF 재협상 등 상대방의 공세를 적극적 해명하면서도,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주장으로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고 약점을 상쇄해갔다.


반면 이회창은 공동책임자라는 김대중의 창 끝을 피하지 못하고, 아들 병역비리에도 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대응으로 국민들의 정서적 반감을 사기 일쑤였다.



TV토론에서 철저히 밀린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 탈당출마라는 여권 내부의 악재를 극복해야했을 뿐만 아니라, TV선거광고와 여론 흘리기에서도 김대중에게 전술적으로 철저하게 지고 만다.


이회창 후보는 서울대에서 버클리로 이어지는 공부 천재이면서 대쪽 판사에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고, 김대중 후보는 상고의 졸업생으로 민주화 투쟁에 일생을 바친 바, 국정 능력으로는 이회창이 준비된 후보일 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 측에서는 김대중은 경제통, 김대중 후보가 펴낸 경제학 책은 하버드 대학교의 대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식으로 경제 천재 김대중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선거운동이 막판으로 치달으며 김대중은 점점 부드럽고 경험 많은 준비된 이미지가 살아나고, 이회창의 대쪽 이미지는 날카롭고 따지기만 한다는 경직된 이미지로 비춰지는 가운데, 좌충우돌하는 선동가 이미지인 이인제의 포기하지 않는 선거운동과 함께 개표의 날이 다가왔다.



15대 대통령선거 결과




충청도 사투리가 느린 이유는 그 분들의 성격이 오히려 급해서라고 하고, 또 충청도 지역은 옛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곳이라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규명할 수 없으나 ,1992년 이후의 대통령 선거의 결정권은 충청도 지역이 쥐고 있음이 틀림없다.


1992년 대선에서는,

충북에서 김영삼 후보 38%, 김대중 후보 26%,

충남에서 김영삼 후보 37%, 김대중 후보 29%,

대전에서 김영삼 후보 35%, 김대중 후보 29%.


1997년 대선에서는,

충북에서 김대중 후보 37%, 이회창 후보 31%,

충남에서 김대중 후보 48%, 이회창 후보 24%,

대전에서 김대중 후보 45%, 이회창 후보 29%.


2002년 대선에서는,

충북에서 노무현 후보 37%, 이회창 후보 31%,

충남에서 노무현 후보 37%, 이회창 후보 31%,

대전에서 노무현 후보 37%, 이회창 후보 31%를 득표하여,


충청승리가 필승조건이라는데,

정작 충청도 지역의 진심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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